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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나의 힘

위태로운 이십대의 표상, 장강명의 <표백>

by 유준의 생존기 2022. 5. 13.

대학생 때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새로이 출간된 책이 수십 권씩 들어왔습니다. 저의 업무는 입고된 책에 '너는 이제 학교 도서관의 소속이다'라는 표식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군대에 가면 군번이 부여되고, 이름과 소속부대가 새겨진 군복을 받는 것처럼요. 책 앞표지에 학교 이름과 바코드가 새겨진 스티커를 붙이고, 세로면에도서기호가 써진 스티커를 붙입니다. 그 기호를 보고 학생들은 서가에서 책을 쉽게 찾고, 아르바이트생들이 대여했다가 반납된 책을 알맞은 위치에 꽂을 것입니다. 책 페이지 면에 도장을 찍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겉면의 스티커들을 다 떼고 훔쳐가더라도 수백 페이지에 걸쳐 'OO대학교 도서관' 인장이 새겨져 있어 도서관 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 안에 도난방지 스티커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붙이면 작업은 끝납니다. 저는 수십 권의 책들에 대한 작업을 기계처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이 우리 인생은 한정되어 있고 책 읽을 시간은 짧은데 어떻게 좋은 책을 선별해서 읽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다른 장르는 모르겠고, 소설책에 대해서는 저의 기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문학상이 엄청 많죠. 국제적으로 유명한 것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 맨부커상 등등이 있죠. 국내에도 정말 많은 문학상이 있습니다. 신춘문예부터 시작해서 이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세계문학상 등등.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제가 처음 선택한 OO문학상은 바로 한겨레 문학상을 받은 소설이었습니다. 카스테라, 지구영웅전설을 쓴 박민규 소설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어느 정도 가치 있다고 느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어떤 소설을 읽어볼까 고민하다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표백>이라는 소설을 손에 집었습니다. 장강명 작가님은 기자출신이신데 글을 정말 재밌게 쓰십니다. 기자 출신답게 사회비판적인 부분을 잘 캐치하시고, 소재에 대한 취재도 소홀하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등단, 합격, 계급>이라는 책도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표백>은 사실 몇 년 전부터 장강명 작가님의 대표작이라 읽어야지 읽어야지 마음만 먹다가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한 줄로 표현하자면 '88만 원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를 21세기 소설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88만 원 세대

정규직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에 등장하는 현재의 10대와 20대에 해당하는 세대. 2007년 출간된 우석훈 경제학 박사의 '88만 원 세대'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됐다. 

- 한경 경제용어 사전 -

 

<표백>에 나오는 이십대의 우울과 좌절의 원인은, 이미 우리 사회가 많은 것을 이룩하여 현재의 젊은 세대가 할 일이 없다는 부존재감에서 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는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일조하셨고, 설령 그렇지 못했더라도 그런 대의적이고 사회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십 대, 삼십 대는 취업과 결혼, 출산과 육아, 인생이 새로운 과제이고 어려운 도전입니다. 저도 그것을 겪은 표백 세대로서 참 힘들었습니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어려워진 사회가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이런 박탈감과 상실감을 가진 주인공이 선택한 극단적인 표현은 바로 '자살'이었습니다.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하여 자살을 유도합니다. (스포 부분은 드래그해서 읽으세요)

 

사실 저는 자살이라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자살률이 최상위권일 정도로 자살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장강명 작가는 그런 사회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여 소설에 적용하였고, 심사위원들은 그런 부분을 높게 평가한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자살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인지 소설이 막 유쾌하게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출신의 소설가가 사회 문제를 꼬집고 풍자한 소설로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무엇이고, 그 가치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우리는 그것을 굳이 추구하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소소한 행복이나 별 것 아닌 정신이라도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며 정신 승리하며 살아도 될까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었습니다. 좋은 영화는 관객들이 영화관을 나오면서 토론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하더라고요. <표백>이라는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추천할만한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더 이상 하얘질 여지가 없는 표백한 세상에 살고 있을까요?